2007년 02월 02일
[낙서] 장면 - 민들레를 찾아서
The Taronian Tales - 1. The Spade (Black wizard of red flame)
--------------------------------------------------------------------------------
Rumitate - 달밤, 민들레와 마법사.
"그저 잠이 오지 않아 달밤에 산책이라도 하는 행인이랄까."
--------------------------------------------------------------------------------
Rumitate - 달밤, 민들레와 마법사.
--------------------------------------------------------------------------------
밤하늘에 어느새 달이 걸렸다.
인적이 뜸해진 골목길을 걷는 소녀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차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숙소로 돌아간다면 도리아의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소녀의 바로 윗 선배인 도리아는 소녀를 괴롭히는 걸 유난히 좋아하는 듯한 여자아이였다. 일을 할때 작은 실수 하나라도 하는가 싶으면 어김없이 나타나 갖은 핀잔에 잔소리를 해대는 것은 물론이고 식사 시간에도 일부러 소녀의 배급 빵을 반쯤 빼돌리고 준다든가 스프 안에 이상한 것을 탄다든가 하며 갖은 심술을 부리곤 했다.
소녀는 도리아가 자신에게 그렇게 심술을 부리는 것은 아마도 그간 도리아가 가장 막내 청소부였기 때문일거라고 추측했다. 자신이 이 청소회사(라곤 하지만 작은 오두막에서 노파 한 명이 운영하는 잡일꾼 고아원에 불과한)에 들어오기 전까지 도리아는 남녀를 합하여 가장 어리고 키도 작은 막내였다.
하지만 그녀는 흔히 사랑받기 마련인 막내의 입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삐쭉 마른 체형에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은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언제나 먹구름처럼 찌푸린 채였다. 게다가 손이 야무지지도 못하고 게으르며 성질만 날카로워서 선배들에게 구박을 받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었고 나중에는 은근히 그녀를 따돌리는 분위기도 생겼다. 도리아는 그러한 구박과 설움을 독을 품으며 버텨냈다. 여차하면 쌓아둔 독을 폭발시켜 남자든 여자든 선배든 가리지 않고 소리지르고 할퀴고 싸운적도 많았다.
그렇게 미움만 받아온 6개월이 지나고 처음으로 들어온 새 후배가 나이도 한 살 많은 소녀 자신이었다.
하지만 도리아는 당연히 나이차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배가 자신보다 한 살 많다는 사실이 더욱 짜증이 났는지 그간 받은 스트레스를 심술과 더해서 모조리 만만한 후배인 소녀에게 쏟아 붓고 있었다. 때문에 마음이 모질지 못한 소녀에게는 요즈음 하루하루가 그저 고역일 따름이었다.
도리아는 갖은 꼬투리를 하나하나 잡아내어서 소녀를 괴롭히곤 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잔소리가 심할 때가 바로 다락방을 같이 쓰게 된 소녀가 늦게 들어올 때였다. 먼저 그 좁은 방을 홀로 쓰던 도리아는 소녀가 새로 들어와 그 방을 둘이서 쓰게 되면서 대단한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소녀는 최대한 자신이 그 방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려고 안그래도 좁은 방의 귀퉁이 끝에 쿡 박혀서 생활해야 하였다. 그것에도 만족이 되지 않았던지 도리아는 툭하면 소녀에게 방해가된다며 짜증을 내곤 했는데 특히 그녀의 잠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제일 싫어하였다. 어쩌다가 소녀가 일 때문에 늦게 방에 들어와서 자신의 취침시간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노발대발하며 손찌검까지 하기도 했다.
소녀는 터벅터벅 걸으며 콧잔등과 뺨에 묻은 검댕이를 손목으로 슥슥 닦아냈다. 머릿속에는 벌써 그 찢어지는 듯 하고도 집요하기 이를데 없는 도리아의 고함소리가 울려오는 듯 했다. 저때 맞았던 뺨이 괜시리 시려왔다. 그날 이후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밤에는 다락방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이렇게 늦게 되었던 건 내 잘못이 아니야.'
라며 소녀는 방금 전에야 비로소 청소를 끝냈던 그 빵집의 굴뚝에게 모든 책임을 넘겼다.
오늘 청소를 맡게 되었던 구르멘 베이커리의 굴뚝은 생각외로 거대해서 청소하는데 한나절의 수고를 쏟아붓지 않으면 안되었다. 보수의 욕심만 조금 덜 냈었더라도 혼자가지는 않았을텐데..라며 스스로 후회도 해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번 자신이 맡았던 임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해내야 하는 것이 이 작은 허드렛일 고아원 오두막의 철칙이었다. 덕분에 소녀는 그 커다란 굴뚝을 작은 빗자루와 막대 걸레, 그리고 양동이 하나로 혼자서 청소를 하느라 일을 마친 새벽 1시가 되어서는 거의 탈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몇 푼 안되는 보수를 받아들고 욱신거리는 몸을 빗자루에 지탱하며 비틀비틀 오두막으로 향하는데 이런 상태에서 도리아의 잔소리까지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녀는 저도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오늘만큼은 도저히 도리아의 짜증을 버텨낼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것, 소녀는 좀 더 밖에서 배회하기로 마음먹었다. 몸이 좀 피곤하긴 해도 지금 들어가 싫은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3시정도 되면 그 도리아도 깊은 잠에 빠져버리겠지.
'요새 몸도 안 좋다잖아. 그래, 좀 어슬렁거리다가 늦게 들어가버리자. 내가 들어가는 것도 모를정도로 푹 잠들어 버릴 때까지.'
하고 소녀는 생각했다. 글쎄, 그렇다면 이젠 뭘 할까.
'할 일도 없으니 요전에 생각해뒀던 민들레나 찾아볼까.'
소녀는 이 기회에 지난번에 찾기로 마음먹었던 민들레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머릿속으로 그동안 지나가면서 민들레를 봐왔던 골목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겨울이 다가오는지라 새벽의 공기는 한층 더 차가웠다. 가장 최근에 본 달이 초승달이었는데 지금 올려다보니 어느새 보름달에 가까워있었다. 얇은 손톱모양의 달이 모르는 사이에 동전만큼 크고 동그랗게 되어서 시린 김을 뿜어대니 추위와 함께 시간의 빠름이 느껴졌다. 요 며칠간 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더니 벌써 겨울이 성큼 다가와있었다. 춥긴 해도 달이 밝으니 민들레를 찾는데 좀 도움이 되려나하며 소녀는 머리를 다시 묶어올렸다. 달빛이 밝은데도 소녀의 머리색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소녀의 머리카락이 밤처럼 어두운 보랏빛이기 때문이었다. 고무줄로 단단히 묶은 머리를 뒤로 늘어뜨리고 새카맣게 변한 앞치마를 툭툭 털고는 본격적으로 민들레를 찾기 시작했다.
"으으응.."
소녀는 실망한 소리를 냈다.
기대하고 왔던 그 골목길에는 이미 철이 지나 까맣게 말라버린 민들레만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겨울이라서 소녀가 찾고 있는 흰 솜이 달린 민들레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무릎을 꿇고 돌바닥과 벽 사이의 틈을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어딜 봐도 죽은 것들 뿐이었다. 소녀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는 자신이 이번 휴일을 이용해 해보려던 실험을 할 수가 없었다. 미리 구해놓은 다른 재료들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었지? 겨울에 민들레를 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얼떨결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구석에서 피는 흔한 민들레 같은 건 언제라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가격이 있는 잡다한 재료들을 사려고 요 일주일간 평소의 배나 일을 맡아서 했는데 정작 민들레 하나를 구하지 못해서 생각했던 실험을 못하게 된 것이다. 소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그 실험을 봄까지 연기해버릴지, 아니면 재료를 활용해서 다른 실험을 해볼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소녀가 이 밤거리를 걷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뭘 찾고있지, 꼬마 아가씨?"
흠칫.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소녀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만 돌려 뒤를 보았다. 큰 키를 가진 남자의 모습이 담벼락의 그림자에 숨어있었다.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소녀를 조금 불안하게 했다.
"누구..세요?"
"나?"
목소리로 보아 남자는 꽤 젊은 듯 했다. 그는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빙긋 웃더니 안심시키려는 말투로 말했다.
"그저 잠이 오지 않아 달밤에 산책이라도 하는 행인이랄까."
사르륵.. 그는 담의 그림자에서부터 나와 희미한 자신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제서야 그가 마치 벽에 붙은 그림자처럼 보였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기다랗고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비교적 어두운 색을 띄고 있는 그의 짧고 덥수룩한 머리는 달빛을 받자 어렴풋하게 하얀 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안경을 벗어 망토 안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물었다.
"여기서 뭘 찾고 있었니?"
"민들레요.."
엉겁결에 말한 대답이었지만 그것이 조금 우습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뱉고 나서야 알았다. 어느 누가 남들이 다 자는 새벽에 밖에 홀로 나와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민들레를 찾는다는 것을 듣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겠는가. 여차하면 조금 정신을 놓은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거기다 지금 소녀의 옷차림은 막 굴뚝 청소를 끝내고 돌아온 탓으로 그다지 깨끗하지도 못했다. 소녀는 뭔가 이런 상황에대한 이유를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그 남자는 소녀의 생각보다 훨씬 상상력과 추리력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마법에 쓰려고?"
"아.."
소녀는 적잖이 놀랐다. 혹시 이사람도 마법사일까?
"네. 알고 계세요? 민들레를 쓰는 마법같은거.."
"민들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길거리 꽃이지만 잎은 중화반응에 쓰이고, 꽃이 지고 흰 솜이 붙은 씨는 간단한 탈공간력을 지니고 있지."
어쩐지 입고있는 옷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남자는 이런 사소한 마법 재료의 성능도 정확히 꿰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마법사인 듯 했다. 소녀는 왠지 한 밤중의 달 아래서 동료라도 만난 것 같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어진 남자의 말에 정곡을 찔렸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인데?"
그것은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줄곧 자신도 생각해오던 사실이었다. 남자는 뭔가 밝아지려다 도로 풀이 죽어버린 소녀의 얼굴과 주변에 말라 죽어있는 민들레 잎들을 번갈아 보고는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었다.
"너, 겨울에도 민들레가 피는 줄 알았구나."
"...생각을 미처 못한 거에요.."
남자는 재밌는 아이라며 즐거운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안그래도 자신 스스로 바보같다고 생각하던 소녀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자꾸 웃자 입을 비죽 내밀었다.
"웃지 말아요. 나도 잘 안다구요. 내가 자주 덜렁대고 생각이 짧은 거."
뾰루퉁한 소녀의 말에도 남자는 혼자서 킥킥거렸다. 소녀는 그만 고개를 돌려버리고 그냥 죽은 잎이라도 채집하려는 시늉을 하듯 다시 허리를 숙였다. 무안한 행동을 감추려고 잎이라도 뜯어버리려는 그때 등 뒤로 다시 남자의 말이 들렸다.
"민들레, 만들어 줄까?"
만들어..? 잘못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고개를 홱 돌렸다. 남자는 팔짱을 끼고 장난스런 표정으로 이쪽을 보며 빙글빙글 웃고있었다.
"민들레를 만들어요?"
"응. 만들지."
놀리려고 하는 말인가. 의도를 알 수 없는 저 말에 소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웬지 저 장난스런 남자의 얼굴로 봐서 자신을 골리려고 하는 소리일 것 같았다. 민들레를 만들다니, 도대체 내가 아무리 만만해보여도 그렇지 그런 소리로 사람이 속아 넘어 가겠는가하고 생각하며 소녀는 남자에게 따졌다.
"거짓말이죠? 그런 말에 누가 속아요."
남자는 여전히 얼굴 가득 장난기어린 미소를 띤 채 소녀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갑작스럽게 그 큰 키의 남자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자 소녀는 저도 모르게 있던 자리를 비켜났다. 남자는 허리를 굽혀 구석에서 죽은 민들레 하나를 뿌리채 뽑아내었다. 그리고 후, 후하며 작게 입김을 불어 뿌리에 뭍은 먼지와 흙을 털어내었다.
"뭐.. 뭐에요?"
소녀의 말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잘보고 있으라는 듯 눈을 힐끗거리며 눈치를 줬다. 곧 그의 얼굴에 장난스러웠던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죽은 민들레를 왼손으로 옮겨쥐고 앞으로 쭉 뻗었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아까 넣어두었던 안경을 다시 꺼내서 썼다.
우우웅..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유심히 앞으로 내민 손을 보고 있으니 희미한 붉은 빛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소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정말 민들레가 살아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명과 관계된 마법같은 것은 소녀에게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뭔가 생명을 다시 살리는 그런 마법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설령 있다고해도 이런 골목길에서 볼 수 있을리가 없잖아.
소녀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동안 남자는 마법을 끝낸 것 같았다. 그는 다시금 빙글빙글 웃으며 가볍게 주먹을 쥔 왼손을 소녀의 앞으로 뻗었다. 그가 자신있게 펼친 손에는 분명 노랗게 살아있는 민들레 한 포기가 수줍게 들려있었다.
"..와아.."
소녀는 감탄했다. 줄기조차 검게 말라 비틀어졌던 그 죽은 민들레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나다니. 소녀는 자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노란 민들레와 그것을 손에 쥔 남자를 번갈아보며 과연 이런것이 마법이고 이런 사람이 마법사구나하고 느끼고 있었다.
"어때?"
그는 우쭐거리며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녀에게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대단해요. 정말. 어떻게 한거에요? 죽은 것을 살리는 마법인가요?"
소녀는 그런 남자를 정직하게 칭찬했다. 그리고 자신도 마법에 관심이 있는 한명의 마법사 지망생(비록 지금은 마을의 청소부에 불과하지만)으로서 그의 마법에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신성제국이라 불리는 실베트리아라면 이런 류의 신성마법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은 아냐. 단지 생명력을 조금 나눠줘서 이 죽어가는 민들레에게 다시금 황금같은 청춘을 돌려준 것 뿐이지. 그리고..."
남자는 민들레의 줄기를 살짝 집었다. 그리고 민들레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사아아아아아...
그의 눈빛에 반응이라도 하듯 민들레는 급속도로 사그라들었다. 노란색의 보드라워보이던 민들레는 소녀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오므라들더니 하얀 솜털과 같은 씨를 단, '황혼의 민들레'로 변해버렸다.
"네가 필요한 민들레는 이거지?"
"..맞아요."
눈앞에서 보이는 연속되는 신비한 마법때문에 소녀는 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않은채 넋을 놓고 있었다. 소녀는 바보라도 된 듯한 표정으로 남자가 건내준 민들레를 받아들었다. 다시한번 만져봐서 알겠지만 그건 분명한 민들레였다. 생각치도 못했던 선물을 받은 소녀는 자신의 조그만 천주머니에 그 선물을 조심스레 넣었다.
"신기하지 않니?"
"..에?"
스스로가 보였던 마법을 자신이 신기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다니, 남자는 일반 상식과는 조금 다른 화법을 지닌 듯 했다. 아까부터 꼭 자기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소녀에겐 남자의 우쭐한 말투에 기분나빠하기보다는 방금 자신의 앞에서 벌어진 마법들을 궁금해하는 것이 먼저였다.
"도대체 무슨 마법이에요? 방금 한 건."
"맞춰봐."
소녀는 은근히 놀림받고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지만 좀더 남자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신성마법?"
"아냐. 난 기도같은 걸 하지 않았잖아."
"그럼 백마법?"
"그것도 아니지. 백마법은 사람에게만 가능한 치료마법이라구. 좀 더 생각을 해봐."
"음... 그렇다면 원소마법인가요?"
"..원소마법 어디에서 이런 마법을 찾을 수 있겠니? 워낙에 고리타분한 마법계열이라 이미 500년 전부터 별로 추가된 마법도 없다고."
"그럼 뭐에요. 진공마법도 아닐테고. 혹시 미스피마법?"
"그건 또 무슨 마법이냐? 유랑민족들이 쓰는 이상한 주술이라도 되는건가?"
"에이~ 모르겠어요. 도대체 무슨 마법이에요? 고대마법인가?"
남자는 답을 가르쳐주는 대신 여전히 싱글거라면서 한 손으로 자신의 망토를 가리켰다.
"... 혹시 흑마법이에요?"
"딩동댕."
"에에엑?"
흑마법이라니? 그 게트리카 섬에서 쓰는 흑마법을 말하는건가? 마법의 재료로 사람의 피나 시체같은 걸 쓰기도 한다는 그 흑마법?
소녀는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장난으로 거짓말도 많이 할 것같은 표정의 남자였지만 왠지 방금 한 말엔 뼈가 있었다. 장난기어린 웃음 속에 살짝 내비치는 진실같은 것. 소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이사람은 흑마법사이거나 강령술사 같은 무서운 사람일까. 다시 올려다보니 그는 언제부터인지 하늘에 뜬 달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
뭐라고 말해야할까. 흑마법이라면 옆나라인 실베트리아에서 국법으로도 금지된 마법이었다. 소녀의 나라인 제논에서는 마법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뜻으로 공식적으로는 인정된 마법이었지만 역시 그 마법의 성격상 꺼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지금 제논국은 자국의 영토중 하나인 게트리카 섬의 흑마법사들과 내전상태이기도 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네."
달을 올려다보던 그는 갑자기 바빠진 사람처럼 그런 말을 흘렸다. 그는 다시 소녀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아까의 말때문에 남자의 그 웃음은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사람은 뭔가 자신이 짐작할 수 없는 상대에게 공포를 느낀다고 했던가. 분명 남자는 평범한 듯 친절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었다. 소녀는 순간 남자의 머리를 보고 오싹해졌다. 분명히 검은 빛을 띄던 머리카락이 달빛이라도 머금은 듯 어느새 새하얗게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저도모르게 뒤로 한걸음을 걸었다.
"이름이 뭐지, 꼬마아가씨?"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는 소녀에게 물었다.
"루.. 루미테이트에요."
"루미테이트.."
남자는 소녀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이 그렇게 조그맣게 읊조렸다. 그는 돌아서서 뭔가를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다시 소녀를 돌아보았다. 뭔가 말을 하면서 짓는 그의 미소는 더이상 친절하거나 부드러워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릴적 무서운 이야기에서 들었던 미치광이 광대가 입이 귀까지 걸리게 웃는다던 그런 미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밤에는 이 근처로 오지 말아. 루미테이트."
"..왜요?"
그는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도록 웃고있었다. 초승달같은 눈이 안경너머로 비쳤다. 하얀 머리카락은 달빛을 받아 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은 만월이 뜨는 날이거든."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남자는 돌아섰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나가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큰 구름 하나가 나타나 곧 만월을 바라보는 둥근 달을 가렸다. 마치 해라도 가린 것처럼 주변이 금새 어두워졌다.
소녀는 문득 자신의 주머니에서 민들레를 꺼내보았다.
방금 전까지 일이 꿈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민들레는 새카맣게 죽어있었다.
내일이면 가장 둥근 웃음을 지을 달은 그렇게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마치 내일을 기다리는 듯이.
# by | 2007/02/02 04:50 | ♠연습장 무더기 | 트랙백 | 덧글(2)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